전체 글19 방위 정책과 통합 유럽방위공동체 앞에서도 밝혔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진된 유럽 통합의 중요한 목적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협력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상호 의존성을 높이려는 시도와 함께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통합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소련과 동구권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집단 안보체제의 형성이 시급해졌다. 집단 안보체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서유럽의 경제적 약화와 소련의 점증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한 집단적 군사·방위 기구로 1949년 4월 12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결성되었고, 1950년대 초 그리스,.. 2022. 12. 31. 슈만 플랜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2 서독의 입장에서 볼 때도 슈만 플랜은 수용할 만한 제안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베를린 봉쇄에 서 보듯이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놓여 있는 서독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서유럽과 강하게 연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외교 정책의 자율성이 사실상 제약되어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대등한 입장으로 협상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독의 외교적 주권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슈만 플랜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로 구체화되었다. 모든 서유럽 국가에게 참여를 권했지만 실제로 참여한 국가는 프랑스와 서독을 비롯하여 벨기에.. 2022. 12. 31. 슈만 플랜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베네룩스 3국이 경제 분야에서 시작하는 통합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라든지 유럽평의회는 그 기구의 성격상 통합을 추진하는 주체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OECC는 기본적으로 마셜 플랜을 집행하기 위한 기구였고, 유럽평의회 역시 통합의 추진을 위한 실질적 수단을 갖지 못한 국가 간 클럽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초국가적 기구의 창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방향으로의 논의가 진전되는 것조차도 원치 않았다. 따라서 통합 논의는 한동안 구체적인 실행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그동안의 통합 논의에 서독은 빠져 있었다. 서독이 유럽 국가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서독이 지닌 경제적 잠재력.. 2022. 12. 31. 유럽 통합의 시동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시장까지 유럽 통합의 움직임은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1948년 6월 유럽 16개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각국의 정당 대표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 유럽의 단합을 논의했던 유럽회의(Congress of Europe)는 초기 통합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 회의에는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그중에는 당시 야당 당수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W. churchill)도 있었다. 유럽회의는 끔찍한 전란을 겪은 후 유럽의 단합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유럽 전역에 폭넓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회의에서는 유럽 각국 간의 다양한 협력과 통합 방안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성과.. 2022. 12. 30.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