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서는 유럽연합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헌법을 마련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추진되었지만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비준에 실패하였다.
유럽 헌법은 기존의 복잡한 조약 체계를 하나의 헌법으로 묶는 것은 물론 유럽 시민들의 기본권을 포괄적인 정치 계약의 형식으로 수립하는 중대한 상징적 진전이었다. 이러한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마련된 리스본 조약도 2008년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비준에 실패함으로써 유럽 통합의 제도 개선은 또 다른 장애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나의 유럽이 강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지고, 회원국의 수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반대의 목소리도 그만큼 커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통합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이 개별 국가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즉 유럽 통합은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주도와 노력이 중요하지만, 국내 여론의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기반이 아래로부터 약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유럽의 극단론은 최근 지지율이 높아진 극우 정당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예컨대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당수 르펜(J. Le Pen)은 유럽 단일 화폐로 인해 프랑스는 독일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2009년 현재 유럽연합 의장국인 체코의 대통령 클라우스(V. Claus)는 반유럽적 성향을 보여 주고 있는데 리스본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며 유럽에 체코의 주권을 양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실질적 정치 권한을 갖고 있는 체코의 토폴라넥(M. Topolanek) 총리는 그와는 반대로 친유럽적 성향을 갖는데, 체코의 사례는 유럽 통합을 둘러싼 복잡한 회원국 국내 정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09년 3월 토폴라넥 내각은 의회의 불신임으로 사퇴하였고 체코의 정치 위기는 유럽연합 의장국 역할의 마비도 동시에 가져왔다.
이러한 모습은, 비록 여러 분야에서 참여 회원국 간 통일성과 동질성이 크게 높아져 통합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 이를 반대하거나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작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통합의 심 화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유럽인들의 정치적 정체성이다. 유럽인들이 자신을 각 개별 국가의 국민으로 배타적으로 인식하는 경우와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따라 유럽 통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997년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 조사에서 프랑스인 중 13%만이 자신을 유럽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32%는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고, 50%는 자신을 유럽 인이며 동시에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통합 유럽에 자신의 정치적 충성심을 배타적으로 부여하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으며, 오히려 대부분은 자신이 개별 국가의 국민이라는데 무게를 더 두거나 혹은 둘 다에 속한다고 하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유럽 통합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로 이해할 수 있다.
통합의 심화와 함께 아직도 여전한 개별 국가의 영향력을 동시에 시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연합의 시민들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여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의 경우 유럽에 대한 소속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서로 상충하기보다는 보완적인 관계라는 사실도 밝혀 졌다.. 이런 점에서 유럽 통합은 통합과 차별화라고 하는 두 조류 간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은 불가피하게 과거 국민 국가에서 고유한 것으로 여겨 온 일부 주권의 부분적 제한을 가져왔고 그로 인한 적지 않은 반발과 진통을 겪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은 꾸준하게 심화·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은 유럽 통합의 모습 속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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