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하나의 유럽이 부쩍 눈에 띄게 되었다.
우선 제2차 세계대 전 이후 철의 장막으로 양분되었던 유럽이 공산권의 붕괴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 공산권 국가들은 유럽으로의 복귀(Return to Europe)를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1990년대와 21세기 초반 장기간에 걸친 민주적 정치 제도의 도입과 시장 경제로의 이행 노력으로 대부분의 중·동 구 국가들은 2004~2007년에 기존 서유럽 중심의 유럽연합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이로써 반세기 이상 분단을 겪었던 유럽은 비로소 다시 하나로 통합하게 된 셈이다. 유럽연합의 회원국은 15개에서 27개로 대폭 증가하였고 명실상부한 유럽 대륙의 정치 단위로 등장하였다.
21세기에 나타난 또 다른 중대한 변화는 유로라는 단일 화폐의 등장이다.
이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독일의 경제 발전을 상징하던 마르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프랑과 이탈리아의 리라 에스파냐의 페세타와 네덜란드의 플로린 등 민족국가를 상징하던 화폐들도 모두 사라졌고 유로가 대신 등장하였다. 역사학자 볼프강 슈말레(WSchmale)는 이를 '지갑 속의 유럽'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만큼 유럽인이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면서 느낄 수 있는 동질성이 강화되었다. 과거 국가의 화폐와 동전에 등장하는 민족 영웅과 기념비가 민족주의의 일상적 상징이었듯이 이제는 유럽의 문명적 동질성을 나타내는 건축의 양식 모형이 유럽인에게 공통의 문화와 역사를 일깨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하나의 유럽은 21세기 들어 더욱 가시적인 모습으로 부상하였다.
유럽 지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는 과거 달러를 들고나가 여행지마다 각국 화폐로 환전해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이젠 달러 대신 유로를 지갑에 넣고 파리로 들어가 암스테르담과 뮌헨, 비엔나와 로마, 마드리드와 리스본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여행할 수 있다. 보다 거시적으로 기업과 은행도 이제는 여신과 투자 업무에서 유럽중앙은행의 정책 성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달러와 유로의 사용 및 보유 비율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한편 한국은 지난 2007년 5월부터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국가뿐 아니라 이제는 아세안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행위자가 국제적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대사에서 개인의 일상까지 하나 된 유럽을 한국에서도 여러 형태로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유럽'이라는 명칭의 대상은 사실 매우 애매하다.
우리는 종종 유럽을 아시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구분하는 지리적인 단 위로 사용하고 있지만, 유럽으로 불리는 지역의 내부에는 적지 않은 상이 함과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위에서 지적한 형식적 정치 단 위나 화폐, 국제 협상에 있어서 하나 된 모습을 보여 주지만 여전히 기존의 국가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영어, 중국에서는 중국어를 하지만 물론 우리의 단순한 인식과는 달리 미국이나 중국의 언어적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유럽에는 유럽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언어만 하더라도 23개나 된다.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도로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은 유럽의 이웃 나라와는 다르다. 국왕이 있는 나라도 있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가도 있다. 대통령은 프랑스에서는 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국가의 통합을 위한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편적이지만, 하나로 불리는 유럽 내부의 다양함과 상이함을 보여 주는 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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