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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3

by 망고러버 2023. 1. 2.

한산한 거리의 유럽

 

 

전체적으로 보아 EEC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경제공동체 내부의 교역량도 증가하였고 공동체 외부 국가와의 교역 규모도 커졌다. 이러한 성과는 부분적으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서유럽 의 경제 분이라는 우호적인 경제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경제 성장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이 EEC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셈이다. 이 밖에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분위기도 EEC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대의 석탄, 철광 산지인 자르지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사실상의 식민지처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었으나, 195510월 지역 주민 투표를 통해 서독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서독 영토로 합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이 문제가 해결되면서 양국 간의 관계가 급진전되었고, EEC의 주축인 두 국가의 화해는 다시 EEC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유럽원자력공동체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공동 개발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 공동체이다.

모네의 발상과 스파크 보고서에 의해 원자력 분야의 통합이 우선적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자력이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으나 원자력 산업의 수준이 높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를 공동으로 개발·이용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또 이러한 협력 관계는 자연히 통합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즉 원자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와 노력이 소요될 것이므로 공동 개발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서독을 원자력공동체라는 틀 속에 참여시킴으로써 서독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견제하려 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유럽원자력공동체는 EEC에 비하면 그리 큰 성 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달리 유럽원자력공동체는 하나의 초국가적 공동체로 자리잡지 못하고 개별 국가의 독자적 행동에 의해 약화되었다. 출범 당시 유일하게 원자력 프로그램을 갖고 있던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다른 국가들은 독자적 개발을 추진 하였다. 결국 Euratom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1959년에 이탈리아와 독일이 독자적으로 원자력 개발에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어려움, 비용, 환경 오염 및 안전에 대한 주민들의 두려움 등이 Euratom의 순항에 적지 않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사실 핵폭탄의 등장 이후 원자력은 결코 군사적 목적과 분리하여 생각할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평화적 이 용을 위한 기구로 Euratom이 등장하였지만 원자력이란 자원 자체는 군 사·정치·안보와 같은 매우 민감한 이슈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자원의 공동 관리에 비해 원자력의 공동관리는 보다 큰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로마 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가 출범하면서 '유럽 6개국의 통합 기구'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포함해 모두 3개로 늘어났다. 각 공동체는 각기 상이한 분야에서 통합의 추진체로 기능하였으나 유사한 기능과 성격을 지닌 기구가 중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 기구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먼저 의회와 법원이 통합되었으며, 19677월에는 세 공동체의 각료이사회가 통합되고 집행 기구가 집행위원회 (European Commission)로 일원화되었다. 이로써 유럽 통합의 기구는 유럽공동체(EC: European Community))로 단일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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