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4월 서독 수상 아데나워(K. Adenauer)는 미국을 방문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서로 통일된 외교 정책을 수립하지 않는 가운데 유럽공동군을 창설하는 일은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서독의 독자적 군대 보유를 막겠다는 목적을 가졌던 플레뱅 계획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지만, 동시에 외교 정책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입장의 통합 없이 국방과 같은 중요 분야의 권한을 (부분적이라도) 초국가적 기구에 이 양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국방, 안보, 공동 외교 정책과 같은 예민한 문제는 통합의 최종적 단계, 즉 상호 신뢰와 확고 한 정책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사실 공동방위 정책은 단일 화폐의 출범이나 국경 정책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야에서의 통합이 상당히 진전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각국 간 이견이 큰 분야의 정책 중 하나이다(8장 참조). 그런 점에서 유럽방위공동체는 여전히 국가 간 불신과 이견이 컸던 통합 운동 초기에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애초 터 제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이 사안은 민족 국가의 전통적인 독점 영역인 상위 정치(bigh politics)의 핵심을 초국가화하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국가 내부적으로 커다란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계획을 주도한 프랑스가 자국 의회에서 비준을 받지 못함으로써 사장되고 말았다.
유럽방위공동체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서독의 재무 장을 포함한 NATO의 강화를 요구하였고,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하는 데에 대한 프랑스의 불만도 여전하였다.
영국 수상 이든(4. Eden)은 독일 재무 장을 둘러싼 미국의 요구와 프랑스의 불안을 해결하는 한 형태로 서유럽동맹(WEU: Western European Union)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유럽방위공동 체 안이 프랑스 의회에서 부결된 지 두 달 만인 1954년 10월 WEU가 창설 되었다. WEU는 기본적으로 1948년에 체결된 브뤼셀 조약에 기초하고 있는데, 브뤼셀 조약에 참여한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개국 등 5개국에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서독과 이탈리아를 추가하여 개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동맹은 EDC와는 달리 초국가적 기구가 아니며 영 국이 선호하는 정부 간 협의체였다. 서유럽동맹은 기본적으로 서독의 군사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출범하였지만, 서독의 독자적인 군대 창설은 EDC가 좌초되면서 사실상 더이상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1955년 5월 서독은 NATO에 가입했고 독자적인 군대도 보유 하게 되었다. 유럽방위공동체의 좌절과 서유럽동맹이라는 제한적 성격의 기구 출범은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국방·안보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주권의 양보가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유럽동맹(WEU)이 출범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그 기능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견제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갖고 출범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NATO 체제하에서 서유럽동맹이 특별히 독자적인 군사 기능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WEU의 역할은 군사적인 것보다 오히려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이 ECSC 출범 이후 통합에 참가한 국가와 불참한 국가로 분열되었을 때 이 두 진영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WEU가 담당했다. 통합 불참국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영국과 통합을 주도해 온 프랑스, 독일이 모두 WEU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구를 통한 양측의 의사소통과 연계가 가능했으며, 드골(C. de Gaulle) 대통령 시절 프랑스가 NATO의 군사 부문에서 탈퇴한 뒤에도 WEU는 프랑스와 NATO 회원국을 이어 주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서유럽동맹을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은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미국 · 소련 간 화해가 가시화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그 목적은 방위 문제에 있어서 미국, 소련과 다른 유럽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로 WEU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서 냉전의 붕괴와 유럽연합의 통합 심화와 함께 최근 들어 WEU의 고유한 역할은 다소 애매해졌다. 2000년 11월에는 WEU의 조직의 기능과 역할을 유럽연합(EU) 차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즉, 유럽연합의 공동 외교 안보 정책 (CFSP)과 유럽 안보 방위 정책(ESDP)의 틀 속에서 서유럽동맹의 역할을 규정한 것으로, 일부 조직은 이미 유럽연합 조직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WEU는 여전히 서유럽의 안보 동맹체로 조직적 독자성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창립 개국에 에스파냐, 포르투갈, 그리스 등 3개국이 추가로 가입하여 10개국이 정식 회원국으로 있다. 이외에 6개의 준회원 국가, 6개의 옵저버 국가, 그리고 깨의 파트너 국가가 WEU와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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