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방위공동체
앞에서도 밝혔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진된 유럽 통합의 중요한 목적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협력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상호 의존성을 높이려는 시도와 함께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통합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소련과 동구권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집단 안보체제의 형성이 시급해졌다.
집단 안보체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서유럽의 경제적 약화와 소련의 점증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한 집단적 군사·방위 기구로 1949년 4월 12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결성되었고, 1950년대 초 그리스, 터키, 서독이 추가로 가입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미국의 주도하에 설립된 일종의 군사 동맹이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의 통합을 위한 기구와는 본 질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NATO의 출범으로 인해 유럽 국가 간에 군사적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당시 소련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서유럽에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약속함으로써 군사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안정의 기반 위에서 유럽 통합 논의가 진전되어 갈 수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 동맹체인 NATO와는 별개로 이보다 조금 일찍 서유럽 일부 국가 간의 자체적인 공동 방위 체제도 구축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미국을 배제한 유럽 국가 간 독자적 방위망의 구축을 주장하였는데, 1948년 조인된 브뤼셀 조약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Box 02 참조). 유럽의 공동 방위 정책의 진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은 한국 전쟁이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군의 남침은 한반도처럼 분단되어 있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소련의 뜻에 의해 동독이 서독을 침공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전쟁의 발발은 유럽 국가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세계적 규모의 냉전 확대와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NATO 회원국이 분담하는 방위비의 증액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이러한 요구를 여전히 취약한 경제 상황 등의 이유를 들어 거부하자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을 통한 NATO 체제로의 편입을 요구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주장은 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군에 의한 무력 침공의 기억은 유럽인들에게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는 전쟁 이후 독일의 무력화(無)를 통한 안전보장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당시 안보 문제에 있어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서유럽으로서는 미국의 이러한 요구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서독의 재무장을 받아들이는 대신 서독 군대의 지휘권을 여러 나라의 공동 관리에 두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950년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플레뱅(R. Pleven)의 이름을 딴 플레뱅 계획(Pleven Plan) 은 유럽 공동군(軍)을 창설하자는 것으로 ECSC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럽 공동군을 창설함으로써 서독의 군대를 공동의 관리하에 두자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공동군에 영국의 참여를 희망했으나 영국은 여전히 이러한 초국가적 통합 기구의 참여에 미온적이었다. 이에 따라 ECSC 6개 회원국만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 European Defence Community)를 결성하기로 하였고, 1952년 5월 파리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방위공동체 조약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보다 민감한 사안인 방위 분야에서 초국가적 기구의 설립을 통한 통합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유럽방위공동체는 프랑스 의회에서 비준을 받는데 실패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유럽방위공동체 안은 프랑스에서 매우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참여국의 공동관리라는 안전조치가 있다고 해도 독일의 재무장을 허용한다는 사실은 당시 많은 프랑스 인들에게 커다란 거부감을 주는 결정이었다. 더욱이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의회 비준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2년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군사적 패배 등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시기에 출범한 망데스 프랑스(P. Mendes-France) 내각은 EDC에 대한 국내의 강한 반발을 의식하여 이미 합의한 조약의 개정을 다른 참여국에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 조약에 대한 비준을 끝낸 다른 국가들로부터 개정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 결국 1954년 8월 EDC 조약 안이 프랑스 의회에서 부결되면서 유럽공동군 창설안은 좌초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에 의해 추진된 EDC 창설 계획은 프랑스의 거부로 인해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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