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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슈만 플랜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by 망고러버 2022. 12. 31.

유럽 놀이기구

 

 

베네룩스 3국이 경제 분야에서 시작하는 통합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라든지 유럽평의회는 그 기구의 성격상 통합을 추진하는 주체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OECC는 기본적으로 마셜 플랜을 집행하기 위한 기구였고, 유럽평의회 역시 통합의 추진을 위한 실질적 수단을 갖지 못한 국가 간 클럽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초국가적 기구의 창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방향으로의 논의가 진전되는 것조차도 원치 않았다. 따라서 통합 논의는 한동안 구체적인 실행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그동안의 통합 논의에 서독은 빠져 있었다. 서독이 유럽 국가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서독이 지닌 경제적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해결책의 모색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럽 통합의 논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은 당시 프랑스 외무 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만(R. Schuman)19505월 유럽의 석탄·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공동 관리할 것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슈만 플랜으로 불리는 이 제안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독일과 프랑스의 제도적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는데, 슈만 플랜의 전제는 유럽(특히 서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 간의 화해와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 1, 2차 세계대전 등 독일과 계속 큰 전쟁을 치러 온 프랑스로서는 자국의 평화와 안보에 가장 중요한 대상이 독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슈만 플랜은 원칙적으로 철강·석탄과 같은 경제 분야에서의 협력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정치적, 군사적인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내심은 영국 등과 군사적 동맹,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분할 지배 방식 등으로 독일을 계속해서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7년 영국과 상호 방위를 약속한 덩케르크 조약(Treaty of Dunkerque)이나, 이에 베네룩스 3국을 포함하여 확대한 1948년의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 모두 독일에 대한 상호 방위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19486월 소련의 서 베를린 봉쇄 이후 소련과 미국 간의 긴장이 더욱 높아지면서,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분할 지배를 종식하고 서독 지역을 통치하는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9486월 맺어진 런던 협약(London Accords)에서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동의함에 따라 19495월 본(Bonn) 을 수도로 하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프랑스가 애당초 생각했던 독일에 대한 견제 방식에 급격한 변화가 오면서 프랑스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탄생을 허용하더라도 석탄 산지인 자르(Scacar)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또 다른 석탄 산지인 루르(Rubr)에 대해서는 그 생산과 공급에 대한 국제적 감시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만큼 독일의 재건에 대한 프랑스의 우려는 대단히 컸다. 그러나 루르에 대한 국제적 감시 체제는 프랑스의 뜻과는 달리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못했으며, 자르 지방에 대한 영토 관할 문제도 독일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슈만 플랜은 이런 상황에서 독일과의 석탄·철강의 공동 관리를 제안한 것이다.

석탄·철강은 중공업의 주요 원료가 되며 특히 석탄은 당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는 점에서 경제적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석탄·철강은 탱크, 대포 등 재래식 무기 생산과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원료라는 점에서, 이를 공동 관리하에 둔다면 경제적 분야에서의 협력 관계를 넘어서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의 방안이 될 수 있었다. 즉 상대방이 전쟁 준비를 한다면 석탄·철강의 수요가 필요 이상으로 크게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공동 관리는 상대 국가의 전쟁 준비를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유럽 통합을 추진한 가장 실질적인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난 뒤 유럽 대륙에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경제적인 분야에서 먼저 추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성격상 정치적, 군사적 동기를 함께 포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만 플랜을 기초한 유럽 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J. Monnet)는 실제로 슈만 플랜이 정치적 통합을 향해 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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