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시장까지
유럽 통합의 움직임은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1948년 6월 유럽 16개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각국의 정당 대표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 유럽의 단합을 논의했던 유럽회의(Congress of Europe)는 초기 통합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 회의에는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그중에는 당시 야당 당수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W. churchill)도 있었다. 유럽회의는 끔찍한 전란을 겪은 후 유럽의 단합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유럽 전역에 폭넓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회의에서는 유럽 각국 간의 다양한 협력과 통합 방안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 회의는 전쟁 이후 많은 이들이 유럽 통합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유럽 국가 간 협력과 통합에 대한 이같은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의 비도 외무장관은 유럽공동의회(European Assembly)의 창설을 제안하였지만 영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이 유럽 통합의 움직임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거나 좌초시키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이에 따라 영국은 유럽공동의회의 대안으로 각료들 간의 협의체 설립을 마지못해 제안했다. 이 제안을 토대로 유럽 각국은 협의를 통해 서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공동의 역사적 유산과 이상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 정부 간 협의기구로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를 발족시켰다. 이 기구는 1949년 5월 5일 런던에서 10개국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출범하였지만 서독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현재 유럽평의회는 유럽의 사실상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기구로 발전하였다.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합의 논의와 함께 지역별로 국지적인 통합 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베네룩스 3국의 경제 통합이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이미 1921년 경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베네룩스(Benelux) 3국의 망명정부는 런던에서 종전 후 관세 동맹을 맺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1948년 3국 간 교역에 대한 관세 철폐, 수입 물품에 대한 공동의 대외 관세 부과 등을 내용으로 하는 관세 동맹이 설립되었다. 이들 3국 간의 협력은 몇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 1960년에는 경제 동맹(Benelux Economic Union)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베네룩스 3국 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규모도 작고 비교적 동질적 인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통합을 이루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국가의 통합에 대한 열정과 '실험적 시도는 보다 확대된 범위에서 유럽의 경제 통합에 매우 중요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 역시 국지적 지 역 통합을 시도하였다.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이들 4개국은 여러 차례의 논의와 시도 끝에 1947년 북유럽경제협력공동위원회(Joint Nordic Committee for Economic Cooperation)를 설립하는데 합의하고 광범위한 관세 동맹의 결성 등 지역 간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협의 과정에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였고, 특히 당시 스웨덴, 덴마크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떨어졌던 노르웨이의 반대에 직 면하면서 이들 국가의 통합 노력은 추진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베네룩스 3국과는 달리 구체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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