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개별 국가의 영향이 정책 결정에 최종적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유럽의 국가들 간에 이루어진 통합의 진전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즉 기능주의 입장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연방 국가와 같은 형태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것은 상당 기간 동안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유럽 통합의 발전이 가로막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유럽 통합은 비록 단선적인 형태로 계속 진전되어 온 것은 아니더라도, 과정마다 발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통합이 심화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유럽의 통합은 일률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실패와 성공이 서로 교차하면서 반복되는 단계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하여 심화되어 왔다.
통합 유럽의 이러한 현실적 성과는 유럽 통합을 바라보는 이론적 시각이 기능주의적 입장이나 개별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 어나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 입각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기능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는 경우 유럽연합이 그동안 이루어 낸 여러 가지 정책적 성과와 제도적 장치, 즉 초국가기구로서의 유럽연합의 특성이 부각될 것이며, 각국의 입장을 강조하는 경우 개별 국가의 정치적 특성과 상이한 이해 관계가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 통합의 역사는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통합을 이끌어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개별 국가와 초국가적 기구로서의 유럽연합, 공적 행위자와 사적 행위자 등 여러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과 제도적 제약 속에서 상호관계를 이 루며 통합을 이루어 왔다. 통합의 과정에서 이러한 양자 간의 상호 관계는 진전과 후퇴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유럽 통합을 바라보는 이러한 이론적 시각의 차이는 유럽 통합의 의미에 대해서도 서로 상이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유럽 통합은 경제적 통합을 통한 점진적 진전이 궁극적으로 연방제인 유럽 합중국으로 이끄는 것이며, 현재 개별 국민 국가를 향한 소속감과 충성심이 연방제 정치 체제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이 된다. 스피넬리는 유럽공동체의 목적으로 모두에게 공통된 법과 제도를 발전시키고, 공동 정책을 통해 특정한 임무를 함께 수행하도록 하며, 외부 세계에 대해 공동의 입장과 책임을 지게 하는 방법으로 몇 개 국가의 운명을 점차 하나로 묶는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견해는 바로 유럽 통합의 의미를 유럽합중국의 건설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즉 유럽 통합의 의미는 개별적이고 분산적이던 국가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되어 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과는 달리 개별 국가의 입장을 중시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유럽 통합은 단일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협력을 제도화한 국제기구일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호프만의 말대로 공동체로서의 국제기구와 그 회원국의 관계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 아니라면, 공동체는 국민 국가의 쇠퇴를 강요하기보다 오히려 그 보존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즉 유럽 통합은 국민 국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가 유럽 통합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의 의미를 개 별 국민 국가의 도구적인 국제기구로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점은, 유럽 통합이 창설자의 의도와 무관한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시각은, 통합의 초기에는 각국의 의도가 협상을 통해 국제기구에 그대로 반영될 수 있지만, 통합이 진전되고 심화될 경우 장기간 추진해 온 공동의 정책은 그 스스로 탄력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정책 네트워크 역시 개별 국가의 수준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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